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내가 읽고 쓰고 배웠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가면서 점점 까먹게 됐는데 그런게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원노트나 삼성노트 같은 기본적인 메모 앱들을 이용해서 열심히 기록도 해봤다. 하지만 체계적이지 않은 기록은 안하느니만도 못 했다.

내가 메모 앱을 사용한 방식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상위 주제를 잡고 중간 주제로 가지를 뻗어나가 하위 주제에 대해서 기록하는 하향식 방식이다. 이런 계층적 구조는 처음엔 깔끔해 보일 수 있으나, 적어야 할 정보가 많으면 많을 수록 복잡해진다. 게다가 모든 지식은 하나의 주제만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한 것이 제텔카스텐이다.

제텔카스텐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정말 우연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원노트를 정리하려고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원노트에 나름 정리한답시고 분류해둔 메모들은 얽힐 대로 얽혀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노트를 대체할 수 있는 획기적인 메모앱이 있으면 좋고, 기존의 원노트를 더욱 깔끔히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면 더더욱 좋았다. 그런 생각으로 메모 앱을 찾고 있다가 옵시디언이란 앱을 알게 됐다. 옵시디언은 마크다운 언어로 메모를 작성한다. 메모가 노트앱에 종속된 포맷이라면 노트앱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보기가 매우 어렵다. 이를 방지하고자 옵시디언은 마크다운을 사용했는데, 마크다운은 이미 Github와 Jekyll 덕분에 익숙했기 때문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하향식인 계층적 구조와 상향식 그래프 구조를 동시에 채택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연구하는 나로썬, 계층적 구조와 그래프 구조 모두 익숙하다. 하지만 메모에 적용한다는 것이 몹시 흥미로웠다. 순전한 호기심에 그래프 구조로 메모를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보니, 제텔카스텐이란 방식에서 나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제텔카스텐은 상향식 방식으로 메모를 관리한다. 메모 하나 하나가 모여 하나의 주제를 이루고, 이는 기존에 있던 주제가 아닌 내가 직접 만들어낸 메모에서 탄생한 주제이기 때문에 새로울 수 밖에 없다. 메모 하나 하나는 매우 모듈화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아이디어만을 보관한다. 이런 획기적인 아이디어 때문에 곧장 책을 구입해서 순식간에 읽어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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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숀케 아렌스
역자: 김수진
출판사: 인간희극
출간일: 2021년 05월 20일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란?

독일의 사회학자인 니클라스 루만은 살아 생전 58권의 저서와 350여 편 이상의 논문을 쓴 엄청난 수준의 다작을 한 인물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조그마한 쪽지에 메모를 한 뒤, 상자에 모았다. 그리고 이를 저서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 방식을 제텔카스텐이라 하는데, 루만의 사후에 제텔카스텐 방법론의 가치가 드러나게 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생산성”을 주제로 한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제텔카스텐은 종이 쪽지란 뜻의 독일어 제텔(Zettel)과 상자란 뜻의 독일어 카스텐(Kasten)의 합성어다. 단순하게 A6 크기의 조그마한 용지에 메모를 적어 상자 안에 넣는 방식이 뭐 그리 대수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텔카스텐의 가치는 메모의 연결에 있다.

alt 데이터의 발전과정
데이터의 발전과정. 데이터를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출처

위 그림은 개인적으로 데이터가 발전하는 과정을 잘 나타낸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림과 같이 의미있는 메모들을 서로 엮음으로써 정보는 지식이 되고, 지식은 통찰이 되고, 통찰은 지혜가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루만은 약 90,000개의 메모를 이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쉽게 연결시켜 다작을 할 수 있었다.


제텔카스텐 방법

메모 상자

루만이 활용한 제텔카스텐 시스템에는 두 가지 메모 상자가 있다. 하나는 문헌 내용에 관한 짧은 메모를 모아둔 ‘서지 메모 상자(bibliographical slip-box)’이고, (현재로 따지면 서지 메모 상자는 엔드노트, 조테로, 멘델레이 같은 서지 관리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직접 생각한 내용들을 적어둔 ‘메인 메모 상자(main slip-box)’이다.

기록

루만은 무언가를 읽고나면 카드 용지 한 면에 서지 정보와 함께 내용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서지 메모 상자에 넣었다. 이후 주기적으로 서지 메모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발전 시켜 나간 뒤, 이를 또다른 카드 용지에 적어 메인 메모 상자에 넣었다. 이때, 필요하다면 아이디어를 확장 시키기 위해 여러 개의 카드 용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배치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적은 카드 용지를 상자에 그냥 배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에 있던 아이디어와 연결을 시키는 것이 바로 제텔카스텐의 핵심이다. 상자 속에서 관련이 깊은 메모 뒤에 새로운 메모를 배치하고 연결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넘버링까지 마치고 나면 아이디어의 연결은 끝이다.

검색

메모를 많이 모아둬도 다시 찾을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루만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엔트리포인트를 적어둔 인덱스 카드를 따로 두고 관리했다. 특정 주제에 대한 엔트리 메모의 위치를 기록해둔 뒤, 이를 따라가면서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검색 시스템을 마련했다.

메모의 종류

메모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다. (이 부분은 논쟁이 있는 듯하다. 실제로 루만이 3가지 종류의 메모를 두고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종류를 구분한 방식은 제텔카스텐(How to take smart notes)의 저자 숀케 아렌스의 고유한 방식일 것이다.)

임시 메모 (Fleeting note)

임시 메모는 말그대로 모든 생각, 아이디어를 담는 메모다. 빠르게 적은 뒤, 추후에 다시 검토하며 보관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보관 가치가 없다면 가차없이 버린다.

문헌 메모 (Literature note)

문헌 메모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지 정보에 관한 메모이다. 여기는 서지 정보와 더불어 짧막한 요약을 적는다.

영구 메모 (Permanent note)

임시 메모와 문헌 메모를 바탕으로 보관하기로 결정된 메모이다. 이 메모는 제텔카스텐의 배치 방식으로 다른 메모와 연결이 된다. 이때, 영구메모는 원자성(Atomicity)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메모는 하나의 아이디어만을 담고 있어야 하며, 다른 아이디어와 연관이 있다면 같은 메모에 작성하지 않고 연결을 짓는다.


블로그 글을 포스팅하면서 제텔카스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게 되었다. 국내는 아직까지 생산성 향상이라는 분야가 생소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Workflow, Productivity 등의 이름으로 생산성 향상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도 최근에 알게 된 개념이라 여러가지 공부를 하며, 각종 툴에 공부한 방법들을 적용해보고 있다.

중요한 정보들을 잊지 않으려고, 내 나름대로의 제텔카스텐 시스템을 구축해보고 있는 중이다. 나만의 제텔카스텐 시스템을 완성해서 자유자재로 아이디어를 보관하고, 연결 짓고, 꺼내 볼 날이 기대된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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